5‧18민주유공자 이남범 씨
“정치권, 5‧18의 역사성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언제까지 들러리 서줘야 이 문제가 해결될까”

5‧18민주유공자 이남범 씨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42주년을 맞이했다. 강산이 네 번은 바뀔 시간임에도 진상을 밝혀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현안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다. 518단체들은 진상규명‘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당면한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지만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미적지근하다.

무안타임스는 520, 무안의 518유공자인 이남범(71) 씨를 만났다. 이 씨는 해제면 출신으로 1980521, 버스를 타고 무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당시 무안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2022년에 이르렀는데도 우리가 언제까지 들러리를 서 줘야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가 떠올리는 1980년의 무안은 어스름한 새벽을 깨우는 한 학생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521일 새벽, 해제를 깨운 어느 목소리

521일 아침, 밥을 먹기 전이었어요. 캄캄한 때는 아니고 어둠이 걷혀서 훤해지고 있었어. 그런데 집 앞에서 큰소리가 나더라고. 무슨 소리인가 하고 나가 봤더니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목쉰 소리로 울면서 광주로 모이자고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광주가 지금 피바다가 되어 있다, 군대가 죄 없는 광주시민을 무차별 총으로 쏘고 대검으로 찌르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 , 이런 놈의 세상을 살면 뭣하겠나. 우리도 광주에 가자. 내 부모형제가 한 사람이라도 죽지 않도록 막아서자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뛰쳐나갔는데. 그날 아침 본 학생은 결국 다시 못 만났어요.

 

무안읍 버스터미널, 군민의 거점지가 되다

곧바로 무안터미널로 향했어요. 와서 보니까 먼저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어요. 무안터미널에 있던 버스는 아마 시위하는 사람들이 탈취했을 거예요. 어떤 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각목을 소지하기도 하고 복면을 쓰거나 총기도 휴대하고 있었어요. 무기를 차창 밖으로 두들기기도 하고요. 자구책을 구한 거죠.

그때 광주는 전부 봉쇄돼서 이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버스에 탑승해서 다 같이 목포시로 가자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산 군부대 앞 도로는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바람에 버스가 지나갈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목포 대신 망운, 몽탄, 해제를 찾아가 돌면서 광주사람에게 들은 그대로 여론화를 했어요. 전두환이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그리고 김대중을 석방하라.

 

무안 군민, 각자의 방식으로 시위에 참여

해제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파출소가 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파출소의 무기고 자물쇠를 총으로 부숴놨더라고요. 그때 사람들이 파출소에 들어가 총을 가져오는 것을 봤어요. 20장 정도 가져왔을 거예요. 그걸 파출소에서 탈취하고 해제 상가를 돌며 구호를 외쳤지요. ‘우리 무안사람 모두 광주로 모입시다. 우리 부모와 형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해제 상가를 버스로 돌아다닐 때는 상가의 슈퍼 등에서 차 안으로 음식을 올려 주셨어요. 주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보내주셨어요. 덕분에 시위하던 사람들은 음료수, , , 이런 것들로 간식 정도를 하며 하루를 보냈어요.

 

21일 이후, 무안 경찰서로 연행되다

그 일이 있은 후, 62일에 당시 시위를 한 사람들을 검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라고요. 그러나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러니 도망갈 이유가 없다. 내가 한 일이 죄라면 죗값을 받더라도 나는 자수를 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근처에 사는 후배와 함께 해제파출소에 자수를 하러 들어갔어요.

역시나 들어가자마자 폭언과 폭력이 있었고, 거기에서 조사받은 뒤에 무안경찰서로 강제연행되어 유치장에 들어갔어요. 경찰서에서 한 15일에서 20일 가량 조사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무수하게도 맞고 발로 차였어요. 그런 흔적이 어느 정도 사라진 뒤에야 면회를 허가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또다시 무안경찰서에서 상무대로

무안경찰서에 있다가 또다시 상무대로, 헌병대 영창으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연행될 때 어머니가 무안터미널에 오셨는데. 나는 포승줄에 묶여서 차 안에 있고,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계엄사로 넘어가면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뼈다귀도 찾을 수 없다는데 지금 이것이 어머니 얼굴을 뵙는 마지막이 아닐까. 그래서 굉장히 슬퍼져 울었어요. 그랬더니 어머님이 네가 뭐가 좋다고 우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냐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헌병대로 떠났어요.

 

죄 없이 죗값을 받는 고통스러운 심정

그 뒤로도 엄청나게 수난을 겪었어요. 별 잘나지도 못한 놈이 그대로 살지, 이런 일에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가족이 힘들게 살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이 모든 걱정들이 제 가슴을 억누르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2022년의 518, 역사성은 어디에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권이 518이라는 이 비운의 사건과 이것이 가진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시 518을 팔아 정치에 이용했지, 법률을 만들고 진실을 파헤쳐 밝히는 문제에는 굉장히 소홀했다고 봐요. 몇년 전부터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어달라고 투쟁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해요. 광주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가하며 기대했지만 금년 역시도 마찬가지였어요. 대통령도 왔지만 역시 그분도 다른 말로 돌리셨어요. 나는 굉장히 서운했어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얼마나 많이 우리가 들러리를 서 줘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 그래서 앞으로도 이 문제는 투쟁으로 이어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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